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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의 역사-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대한민국 ②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곽영민목사 · 곽영민 · 입력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개화기·독립협회·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국민주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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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민 목사 - 본지 및 에녹부흥타임즈 발행인

 

 

들어가는 말 ― 1948년 이전에도 대한민국을 향한 꿈은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흔히 1948년을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같은 해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1948년의 대한민국 헌법에 등장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이라는 원칙은 과연 그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인가?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제와 국민주권이라는 정치적 이상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에서 명확하게 제도화되었으며, 그 이전에도 개화기 조선에서 정치참여와 의회정치, 민권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다.

 

특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규정하고, 인민의 평등과 선거권·피선거권을 명문화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1948년에서 거꾸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19세기 말의 정치적 변화다.

 

한 표의 역사-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대한민국 ②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 본문 이해를 돕기위한 인포그래픽(= 코리아인사이트) 

 

1. 조선의 전통적 정치질서와 근대적 정치질서의 충돌

19세기 조선의 정치질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제였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국왕에게 있었고, 정치 참여 역시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 국민참여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구 근대사상과 국제질서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새로운 정치적 질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은 어떤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

 

국왕의 권력은 어디까지인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백성은 단순히 통치받는 존재인가, 아니면 국가의 구성원인가.

 

이러한 질문은 훗날 민권과 국민주권의 논의로 발전하게 된다.

 

 

2.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1896년 창립된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정치·사회운동의 중요한 조직 가운데 하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과 자주독립 의식의 확산뿐만 아니라 정치개혁과 민권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중요한 현상이 만민공동회였다.

 

1898년 3월 10일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종로에 모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만민공동회는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철수를 요구했고, 고종은 다음 날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즉, 국왕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민중의 집단적 의사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를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던 정치적 사건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선거와는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였다.

 

정치적 의사 형성 과정에 일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3. 만민공동회가 보여준 새로운 정치문화

만민공동회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국가의 중요한 정치문제를 논의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통적인 왕조정치와는 다른 정치문화였다.

 

국가의 문제는 왕과 대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차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훗날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정치운동을 현대 민주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1890년대의 조선은 여전히 군주국이었다.

 

보편적 선거제도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의미는 완성된 민주주의가 존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민권과 정치참여의 요구가 공개적으로 등장했다는 데 있다.

 

 

4. 의회정치라는 새로운 상상

1898년 독립협회와 개혁정부가 추진했던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중추원을 의회적인 기관으로 개편하려는 시도였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는 당시 독립협회가 중추원을 상원으로 개편하고 의회를 설립하려 했으며, 의원 선출이 추진되었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왕과 관료의 영역에만 두지 않고 대표를 선출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의회정치를 구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도는 지속되지 못했다.

 

당시의 정치적 갈등과 권력투쟁 속에서 개혁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실패한 제도가 반드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제도가 실제로 정착하지 못했더라도 그 제도를 만들려 했던 시도 자체가 이후 정치사상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5.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전환점 ― 1919년

그리고 20여 년 뒤 한국 역사에서 거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난다.

 

1919년 3월 1일이다.

 

3·1운동은 단순한 독립시위가 아니었다.

 

독립선언서는 당시 한국인이 자신들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1차 사료다.

 

독립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국민이라는 것을 선언하노라.”

 

그리고 인류 평등과 자유,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강조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다.

 

국민이다.

 

 

6. ‘백성’에서 ‘국민’으로

전통적인 군주국에서 백성은 왕의 통치를 받는 존재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함께 인간은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1919년 독립선언서는 한국인을 자주적인 국민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정치적 언어의 변화다.

 

독립이 단순히 왕조를 회복하는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주체가 되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다만 독립선언서 하나만으로 당시 모든 독립운동가가 동일한 정치체제를 구상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 내부에도 다양한 정치적 구상이 존재했다.

 

따라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1919년 독립선언이라는 핵심 문서에 자주·독립·자유·평등·국민이라는 근대적 정치언어가 명시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7. 3·1운동과 국민의 정치적 등장

 

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한 3·1운동 관련 학술연구에서도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주요 도시를 거쳐 농어촌 지역까지 확산되었으며,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시위, 태극기 게양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사실이 확인된다.

 

중요한 것은 참여자의 범위였다.

 

3·1운동은 특정 정치 엘리트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학생과 종교인,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따라서 3·1운동은 한국인이 정치적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현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구별해야 한다.

 

3·1운동은 선거가 아니었다.

 

국민이 투표함에 투표한 사건도 아니다.

 

하지만 국민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훗날 국민주권의 발전과 연결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8. 3·1운동 이후 등장한 새로운 질문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독립된 국가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누가 국가의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가.

 

왕정을 회복할 것인가.

 

공화제를 선택할 것인가.

 

국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국가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답이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등장한다.

 

9. 1919년 4월 11일 ― 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적 기초가 되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정·공포되었다.

 

이 문서는 단 10개 조항으로 구성된 짧은 문서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왕국이 아니다.

 

군주국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다.

 

이것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정치적 선언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최초의 헌법적 문서로 평가하며, 민주공화제와 대의제, 인민의 자유와 선거권·피선거권 등을 규정한 점을 설명하고 있다.

 

 

10. 더욱 놀라운 조항 ― 인민은 평등하다

임시헌장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에게 남녀의 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없으며 모두 평등하다고 규정했다.

 

이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당시의 신분질서와 비교하면 상당히 큰 정치적 변화였다.

 

왕족인가.

 

귀족인가.

 

양반인가.

 

평민인가.

 

가난한가.

 

부자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이러한 사회적 차이를 정치적 기본권의 근거로 삼지 않겠다는 원칙이 헌법적 문서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단계에서 참정권이 등장한다.

 

 

11.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5조 ― 선거권과 피선거권

 

임시헌장 제5조는 대한민국 인민 가운데 공민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을 규정했다.

 

이 조항은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한 표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다.

 

왜 중요한가?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를 선언한 것에서 더 나아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적 문서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즉, 민주공화국 → 국민주권 → 정치적 권리 → 선거권·피선거권이라는 연결이 나타난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제24조가 국민의 선거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역사적 연결은 더욱 중요해진다.

 

 

1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는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구별해야 한다.

 

헌법에 민주주의 원칙을 규정하는 것과 실제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해외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였다.

 

따라서 현대 국가처럼 안정된 영토와 행정기관, 선거관리기관을 가지고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정기적인 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공화제라는 헌법적 원칙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헌법적 원칙을 먼저 선언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3. 임시의정원 ― 대표제의 실험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당시 29명이 참석했고, 이 회의에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다.

 

이후 임시의정원은 헌법 제정과 개정, 법률 심의·의결, 대통령 선거, 예산·결산 등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임시의정원은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이것은 한국 정치사에서 대표기관을 통한 정치참여가 제도화되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14. 1919년 9월 ― 대한민국 임시헌법

같은 해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4월의 임시헌장을 보다 상세하게 개정한 문서였다.

 

이 헌법은 총 58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임시대통령, 임시의정원, 국무원, 법원 등의 국가기관을 규정했다.

 

특히 중요한 것이 권력분립이었다.

 

제5조는 입법권을 의정원이, 행정권을 국무원이, 사법권을 법원이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즉, 입법·행정·사법의 권력을 분리하는 헌법적 원칙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선거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의 정치참여뿐만 아니라 권력 자체를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분산시키는 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15. 임시대통령도 법과 헌법 아래 있었다

1919년 임시헌법은 임시대통령의 권한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헌법과 법률을 준수할 것을 선서하도록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대통령에게 무제한적인 권력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 역시 헌법과 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 원리는 앞선 제2편에서 살펴본 마그나카르타 이후 발전해 온 ‘권력 제한’이라는 민주주의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16. 그렇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은 언제인가?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연도만을 답으로 제시하기 어렵다.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1890년대에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권과 정치참여, 의회정치에 관한 논의와 운동이 나타났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통해 독립과 자유, 국민의 정치적 주체성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해 민주공화제를 헌법적 원칙으로 명문화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규정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통치구조와 권력분립을 규정했다.

 

그리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실제 국가체제가 출범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하나의 날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정치참여의 형성, 3·1운동의 국민주권적 경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헌법화,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체제의 성립이라는 여러 단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17.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여기까지 읽으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1919년 임시헌장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규정했다면, 실제로 모든 국민이 같은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헌법에 권리가 적혀 있는 것과 그 권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행사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바로 이 문제가 반복된다.

 

헌법에는 국민주권이 적혀 있는데 실제 정치에서는 권력이 국민의 의사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다.

 

선거제도는 존재하는데 선거의 자유가 충분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

 

투표권은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선거과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헌법의 문장과 실제 정치현실을 반드시 분리하여 살펴봐야 한다.

 

이 원칙은 앞으로 이 연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될 것이다.

 

 

18. 민주주의는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1919년의 문서들은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민주공화제의 원칙을 보여준다.

 

그러나 헌법에 민주주의라고 적었다고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실제 제도 속에서 작동해야 한다.

 

국민이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후보자가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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