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교회는 9월에 총회를 하는가?(1) ― 1907년 독노회에서 1912년 첫 총회까지
곽영민목사 · 곽영민 · 입력
한국교회 9월 총회의 뿌리를 찾아서

9월이 되면 한국교회는 특별한 계절을 맞는다.
전국의 장로교회마다 총회 현수막이 걸리고, 총대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총회장과 부총회장 선거가 치러지고, 각종 헌의안과 교단의 정책이 논의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을 비롯해 여러 장로교단이 9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모습은 이제 한국교회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하필 9월일까?
성경이 9월에 총회를 열라고 명령한 것일까?
장로교 헌법이 모든 총회에 9월 개최를 요구하는 것일까?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9월 총회'는 성경에 기록된 제도가 아니다. 한국 장로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전통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 도착한다.
1907년 9월 17일, 한국 장로교회의 중요한 전환점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공개한 역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독노회에는 한국인 장로 36명, 선교사 33명 등이 참여했으며,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회로부터 일정한 자치권과 권징권을 갖는 교회 조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날은 단순히 하나의 회의가 열린 날이 아니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 중심의 선교 단계에서 벗어나 한국인 지도자가 목회와 교회의 중요한 영역을 담당하는 자치적인 교회로 발전하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특히 독노회는 그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한국인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었다.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이들은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 7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독노회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교회가 단순히 외국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은 교회가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백석총회 제49화 정기총회 모습(총회장 이승수 목사 취임을 축하하며 기념촬영)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왜 9월인가?
1907년 독노회가 9월에 열렸다.
그리고 이것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정리한 역사 연혁에 따르면 독노회는 이후에도 계속 9월에 회집했다.
* 1907년 9월 — 제1회 독노회
* 1908년 9월 — 제2회
* 1909년 9월 — 제3회
* 1910년 9월 — 제4회
* 1911년 9월 — 제5회
그리고 결정적인 해가 찾아온다.
1911년 9월.
제5회 독노회에서 한국 장로교회는 기존의 7개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하고, 다음 해인 1912년 9월 총회로 모이기로 결의했다.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1912년의 첫 총회가 우연히 9월에 열린 것이 아니다.
1911년 독노회가 이미 “1912년 9월 총회”를 결정했다.
즉 9월이라는 회집 시기는 총회가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독노회 시절부터 이어져 온 회무 주기의 연장선에 있었다.
1912년, 7개 노회가 하나의 총회가 되다
1911년 9월의 결의에 따라 전국의 7개 대리회가 노회로 개편됐다.
그리고 1911년 말부터 1912년 초까지 차례로 노회가 조직됐다.
전라노회, 경충노회, 황해노회, 경상노회, 평남노회, 함경노회, 평북노회 이렇게 전국적인 장로교회 조직의 기본 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12년 9월이 왔다.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 전국 7개 노회가 파송한 총대들이 모였다.
목사 96명, 장로 125명, 총 221명.
이들이 모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했다.
당시 한국 장로교회 전체의 규모는 상당했다.
총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전국 장로교회에는 목사 128명과 장로 225명이 있었으며 교인 총수는 12만7,228명에 달했다.
오늘날 수천 명의 총대가 모이는 한국교회의 총회와 비교하면 221명은 작은 숫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1912년의 221명은 한국 장로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들이었다.
이날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으로 전국적인 노회를 하나의 총회 아래 묶었다.
첫 총회는 무엇을 했는가?
1912년 첫 총회는 단순히 임원을 뽑기 위해 모인 회의가 아니었다.
총회의 조직 자체가 한국 장로교회의 새로운 교회정치 질서를 의미했다.
첫 총회장에는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가 선출됐다.
부총회장은 길선주 목사였다.
서기는 한석진 목사, 부서기는 김필수 목사, 회계는 방위량(W. N. Blair) 목사, 부회계는 김석창 목사가 맡았다.
특히 한국인 목사 길선주가 부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당시 한국교회에서 한국인 지도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9월'의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역사 연구자는 조심해야 한다.
현재 확인되는 공식 연혁과 역사 자료를 보면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노회가 계속 9월에 열렸고, 1911년에는 명시적으로 다음 총회를 1912년 9월에 열기로 결의했다는 사실은 확인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국교회가 9월에 총회를 여는 이유는 오직 ○○ 때문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신중하지 못하다.
일부 한국교회사 자료에서는 9월 회집의 배경으로 1884년 9월 알렌 선교사의 내한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9월 총회의 유일하거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할 만한 1차 사료는 더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확인되는 가장 확실한 결론은 이것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9월 총회 전통은 1912년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907년 독노회가 9월에 조직됐고, 이후 독노회가 매년 9월에 회집했으며, 1911년 제5회 독노회가 1912년 9월 총회를 명시적으로 결의했다.
그리고 그 전통이 총회 조직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다.
'9월 총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 → 독노회 조직
↓
1908년 9월 제2회 독노회
↓
1909년 9월 제3회 독노회
↓
1910년 9월 제4회 독노회
↓
1911년 9월 제5회 독노회 → 7개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 → 1912년 9월 총회 개최 결의
↓
1912년 9월 1일 7개 노회 총대 221명 →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 조직
↓
2026년 9월 한국교회 곳곳에서 정기총회 개최
119년 전의 9월과 오늘의 9월
2026년 9월.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이 총회를 열고 있다.
총회장이 선출되고, 정책이 결정되고, 헌법이 개정되고, 노회와 교회의 미래를 논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총회 현수막 아래 서 있을 때 한 번쯤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9월 총회는 단순히 달력에 표시된 연례행사가 아니다.
그 뿌리에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한국 장로교회의 자치와 조직화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1911년에는 다음 해 9월 총회를 열기로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그 결의가 이듬해 9월 실제 총회 조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9월 총회는 1912년으로부터 이어져 온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기억이기도 하다.
다음 편 예고
제2편, 221명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평양에 모였나? ― 1912년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현장을 복원하다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 모인 221명의 총대들은 어떤 모습으로 앉아 있었을까?
무엇을 논의했고, 무엇을 결정했으며,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얼마나 성장해 있었을까?
그리고 첫 총회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실제로 어떤 안건들이 다뤄졌을까?
다음 편에서는 1912년 총회록과 당시 교회사 자료를 따라가며 그날의 총회를 가능한 한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복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