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표의 역사-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대한민국 ①
곽영민목사 · 곽영민 · 입력
한 표의 역사-민주주의와 선거, 그리고 대한민국 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며, 국민의 한 표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가

곽영민 목사 - 본지 및 에녹부흥타임즈 발행인
들어가며 ― 한 장의 투표용지에 담긴 수천 년의 역사
오늘날 우리는 선거일이 되면 지정된 투표소를 찾아가 신분을 확인하고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한 뒤 투표함에 넣는다. 몇 분이면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이 짧은 몇 분의 권리를 얻기까지는 수천 년이 필요했다.
왕이 나라의 주인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귀족만 정치에 참여했던 시대도 있었다. 재산을 가진 남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었던 나라가 있었고,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민의 절반에게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 사람이 행사하는 한 표는 단순한 종이 한 장이 아니다.
그 한 표에는 인간이 권력의 객체에서 국가의 주권자로 변화해 온 역사가 담겨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따라서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민주주의에 관한 거의 모든 논의는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demos와 kratos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 demos는 시민 또는 인민을, kratos는 지배 또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국민이 정치적 권력의 원천이 되는 정치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로 결정하는 제도”라고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에는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첫째는 국민주권이다.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왕이나 군대, 특정 계급 또는 특정 정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정치적 평등이다.
권력자와 일반 시민의 한 표가 선거에서 동일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
셋째는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이다.
국민이 협박이나 강요를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국제사회가 민주주의를 평가할 때도 단순히 ‘선거가 존재하는가’만을 보지 않는다. 선거가 경쟁적이며 포괄적인지, 선거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지, 정당 활동이 자유로운지, 개표과정에 중대한 부정이나 편향이 존재하지 않는지 등을 함께 살핀다. International IDEA 역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로 경쟁적이고 포괄적인 국민선거와 신뢰할 수 있는 선거를 제시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러한 국민주권 원칙을 헌법의 출발점에 두고 있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이 조항은 단순한 선언문이 아니다.
대통령과 국회, 정부와 법원, 지방자치단체 등 대한민국에서 행사되는 모든 공적 권력의 궁극적인 정당성은 국민에게서 비롯된다는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권력을 가진다는 선언을 실제 정치제도로 구현한 체제이다.
2. 그런데 국민은 어떻게 주권을 행사하는가
여기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수천만 명의 국민이 매일 한곳에 모여 국가의 모든 정책을 직접 결정할 수는 없다.
고대의 작은 도시국가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정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현대 국가의 규모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대부분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한다.
국민이 자신을 대신하여 국가권력을 행사할 대표자를 선출하고, 일정 기간 뒤 다시 국민의 평가를 받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때 국민과 국가권력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가 등장한다.
바로 선거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은 권력을 만드는 동시에 그 권력을 교체한다.
권력자가 스스로 자신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기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회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가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하기 어렵다.
3. 왜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표현은 헌법상의 법률용어라기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국가기록원 역시 국민의 한 표를 행사하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상당히 정확한 정치학적 의미가 들어 있다.
꽃은 오랜 성장 과정 끝에 피어난다.
민주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정당을 만들 자유가 있어야 한다.
후보자가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투표를 강요받지 않아야 한다.
각 사람의 표가 동등하게 계산되어야 한다.
투표의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실제로 선택한 결과가 그대로 집계되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의 제도로 표현되는 것이 선거이다.
따라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니지만 국민주권이 가장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는 순간이다.
4. 국제사회는 선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선거권을 단순한 국내 정치제도가 아니라 기본적 인권의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유엔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선언 제21조는 모든 사람이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하여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더 중요한 내용은 그 다음에 등장한다.
정부 권력의 기초는 국민의 의사이며, 그 의사는 정기적이고 진정한 선거, 보통·평등선거, 비밀투표 또는 이에 상응하는 자유로운 투표절차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현대 민주선거의 핵심을 압축한다.
선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민주선거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선거가 진정한 선거(genuine elections)이어야 한다.
국제적인 선거원칙을 발전시켜 온 베니스위원회의 「선거에 관한 모범관행규약」도 민주적 선거의 기본원칙으로 보통·평등·자유·비밀·직접선거를 제시한다. 또한 이러한 원칙은 기본권 보장, 공정한 선거관리, 실효적인 불복절차와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선거의 핵심은 단순히 투표하는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 실제 의사가 왜곡되지 않고 국가권력으로 변환되는 데 있다.
5. 참정권이란 무엇인가
참정권은 국민이 국가의 정치적 의사 형성과 권력 구성 과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말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중심이 되고, 넓은 의미에서는 공무담임권과 국민투표 등에 참여하는 권리까지 포함하여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24조에서 모든 국민의 선거권을 헌법적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제25조에서는 공무담임권을 규정한다.
참정권이 다른 많은 권리와 구별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표현의 자유나 재산권이 개인의 자유영역을 보호하는 기능을 강하게 갖는다면 참정권은 개인의 권리인 동시에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기능을 가진다.
한 사람의 투표는 개인적인 의사표시이지만 수백만 개의 투표가 합쳐지는 순간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를 만드는 국가적 결정이 된다.
따라서 선거권은 개인과 국가를 연결하는 특별한 기본권이다.
6. 참정권은 왜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가
여기서는 표현을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참정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라고 말하면 헌법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상의 기본권은 필요한 경우 법률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 다만 그 제한은 헌법적 원칙과 비례성을 지켜야 하며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다.
국가나 권력자 또는 제3자는 국민의 참정권을 자의적으로 박탈하거나 왜곡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누군가가 대신 바꾸어 버린다면 국민주권이라는 헌법의 출발점 자체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한 표를 없애는 것,
두 표를 한 표로 만드는 것,
투표하지 않은 사람의 의사를 투표한 것으로 만드는 것,
특정 후보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
실제 표와 다르게 집계하는 것,
법적 근거 없이 특정 국민에게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러한 행위들은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된다.
국민의 의사를 다른 의사로 대체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선거권 침해가 특별히 중대한 이유이다.
7. 한 표의 평등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적 선거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평등선거’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한 표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긴 역사적 투쟁 끝에 자리 잡은 원칙이다.
과거 일부 국가에서는 재산이나 신분에 따라 투표권을 다르게 인정하거나 복수투표를 허용하기도 했다.
보통선거가 확대되면서 ‘한 사람, 한 표’라는 정치적 평등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한 표의 가치는 그 사람의 재산, 직업, 학력,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대통령의 한 표도 한 표이고,
기업인의 한 표도 한 표이며,
일용근로자의 한 표도 한 표이다.
이것이 선거가 구현하는 정치적 평등이다.
8. 비밀투표는 왜 중요한가
투표가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표현하려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가 권력자나 고용주 또는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어 불이익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현대 민주선거에서는 비밀투표가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인권선언도 국민의 의사가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도록 비밀투표 또는 이에 준하는 자유로운 절차를 요구한다.
비밀투표가 보호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정보가 아니다.
양심에 따라 선택할 자유이다.
선거에서 비밀성이 사라지면 매수와 협박, 보복과 강요의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는 누가 투표했는지는 확인하되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알 수 없도록 하는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9. 대한민국의 국민주권은 1948년 헌법에서 이미 선언되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법적 출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이 선거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실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처음 실시된 직접적인 국회의원 선거였다. 당시 선거제도에는 보통·평등·비밀·직접선거의 원칙이 도입되었고 만 21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제헌헌법은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규정하였다.
놀라운 점은 이 원칙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근간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권은 바뀌었다.
헌법도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대통령 선출방식도 변하였다.
그러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근본원칙은 유지되어 왔다.
10.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한 선거’인가
앞으로 우리가 대한민국 선거사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여기에서 나온다.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이겼다고 공정한 선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졌다고 부정선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정한 선거 여부는 증거와 절차로 판단해야 한다.
선거권이 보편적으로 보장되었는가.
표의 가치가 평등했는가.
유권자의 선택이 자유로웠는가.
투표의 비밀이 보장되었는가.
투표가 적법하게 관리되었는가.
개표 결과가 실제 투표의 결과를 정확하게 반영했는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검증하고 다툴 수 있는 제도가 작동했는가.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사용할 기준이다.
맺음말 ― 민주주의의 시작과 끝에는 국민이 있다
민주주의를 제도만으로 설명하면 복잡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의외로 단순하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리고 선거는 그 선언을 현실의 권력으로 바꾸는 장치이다.
그래서 투표는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다.
한 사람의 한 표는 그 사람이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동등한 주권자임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 표가 자유롭게 행사되어야 하고,
그 표가 다른 사람의 표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그 표가 비밀로 보호되어야 하고,
그 표가 실제 결과에 정확하게 반영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에 대한 의혹을 검증할 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역사는 주장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의해 확인된 사실로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으로 이 연재가 지킬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다음 편에서는 시간을 수천 년 전으로 돌린다.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고대 아테네에서 국민주권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한 표가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권리였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