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년 선교에도 복음화율 0.3%"…방글라데시, '제자를 세우는 동반자 선교'를 제시하다
미션 · 곽영민 · 입력
"230년 선교에도 복음화율 0.3%"…방글라데시, '제자를 세우는 동반자 선교'를 제시하다
【코리아인사이트】 "230년 동안 복음이 전해졌지만 방글라데시의 복음화율은 아직도 0.3%입니다. 이제는 건물을 세우는 선교보다 사람을 세우는 선교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방글라데시 박필우 선교사는 18년간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방글라데시 선교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선교의 방향을 진솔하게 나누었다. 그는 교회 개척과 교육사역, 장학사업, 무료급식 사역을 소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현지 지도자를 세우는 '동반자 선교'가 방글라데시 선교의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청년 단기선교가 평생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박종훈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여정을 청년 시절의 단기선교에서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2002년 청년 시절 1년간 방글라데시 단기선교를 다녀온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선교사의 길을 결단했다.
신학교에서 함께 선교의 비전을 품었던 아내와 결혼한 뒤 함께 선교사로 헌신했고, 2008년 가족과 함께 방글라데시에 입국했다.
당시 네 살이던 큰아들은 어느덧 성인이 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되었고, 그는 "18년 동안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친히 키워주시고 책임져 주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를 드렸다.
방글라데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박 선교사는 방글라데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래 방글라데시는 인도의 한 지역이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지만, 동파키스탄 주민들은 오랫동안 정치·경제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는 "인력과 자원은 대부분 서파키스탄으로 이동했고, 심지어 방글라어까지 없애려는 언어 말살 정책이 시행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방글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71년 치열한 전쟁 끝에 독립을 이루었다.
"방글라(Bangla)는 언어를 의미하고, 데시(Desh)는 나라를 뜻합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는 '방글라어를 사용하는 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윌리엄 캐리로 시작된 방글라데시 선교
방글라데시 선교의 역사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
1793년 벵골 지역에 들어온 캐리는 성경을 방글라어로 번역하며 복음의 기초를 놓았다.
현재도 방글라데시에서는 초기 번역본인 '캐리 성경'과 새롭게 번역된 성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 선교사는 방글라데시 선교를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영국 식민지 시기의 선교, 두 번째는 동파키스탄 시절의 선교, 세 번째는 1971년 독립 이후의 선교이다.
특히 동파키스탄 시기에는 기독교 활동이 크게 위축되면서 선교가 사실상 암흑기를 맞았지만, 독립 이후 다시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방글라데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백석총회는 1990년부터 선교를 시작했다.
현재는 초기 선교사들이 귀국하면서 자신이 현지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교회 개척에서 교육선교로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교회를 개척했다.
복음을 전하며 지역교회를 세운 뒤,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방과후학교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가정을 방문해 부모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지금까지 6개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현재도 두 곳의 방과후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을 전도하면 가정이 열리고, 가정이 열리면 마을이 변화된다"며 교육을 통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꿈을 잃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어린 학생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학교를 떠나는 현실이었다.
13~14세만 되면 어린 소녀들은 결혼을 하고, 또래 남학생들은 공장으로 일을 나갔다.
그는 등록카드를 작성하면서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적게 했는데, 대부분 "선생님이 되고 싶다", "의사가 되고 싶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 "군인이 되고 싶다"고 적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부모들과 상담한 결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학교를 계속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렇다면 내가 장학금을 마련하겠다"며 한 명씩 후원을 시작했고, 그 작은 시작은 현재 60명의 학생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으로 성장했다.
"영혼도 자라고 몸도 자라야 합니다"
교육과 함께 시작한 또 하나의 사역은 무료급식이었다.
아이들을 안아보면 또래 한국 아이들보다 훨씬 왜소했다.
조사해 보니 대부분 한 달에 두 번 정도밖에 고기를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도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셨다"며 영적인 성장과 육체적인 성장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매주 한 차례씩 약 90명의 어린이들에게 고기와 과일이 포함된 영양식을 제공하는 무료급식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먼저 사랑을 보여줄 때 복음도 함께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를 넘어 세계를 섬기는 리더로"
장학사업은 단순히 학비를 지원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수도 다카로 보내 국제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 이유는 "방글라데시 안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지도자를 세우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음세대를 세계를 품는 글로벌 리더로 세우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선교 전략이라고 소개했다.

"이제는 동반자 선교를 고민해야 합니다"
발표 후반부에서 박 선교사는 세계 선교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대표적인 국제선교단체인 SIM이 과거처럼 땅을 사고 건물을 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 제자를 세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선교사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닙니다. 현지인이 중심이 되고, 선교사는 그들을 돕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러한 선교를 '동반자 선교'라고 설명하며, 비즈니스 선교(BAM)와 현지 지도자 양성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사들도 언젠가는 철수해야 하기 때문에, 현지 교회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출구전략'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30년이 지나도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박 선교사는 발표를 마치며 방글라데시 선교의 현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 이후 2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헌신했지만, 현재 방글라데시의 복음화율은 여전히 0.3%에 머물러 있다.
한국교회 역시 지난 수십 년간 교회개척과 신학교, 교육, 의료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펼쳐왔지만, 여전히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선교위원회에서도 늘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저 역시 정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협력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 모델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건물을 얼마나 세웠는가보다 예수님의 제자를 얼마나 세웠는가를 고민하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며 "내일모레 안식년을 마치고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간다. 방글라데시 선교를 위해 계속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며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