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환타지 소설《영광에 이르기까지》제1권 ―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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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에 이르기까지》
제1권 ― 부르심
장르:언약 서사(Covenantal Epic), 구속 판타지(Redemptive Fantasy)
글: 곽영민
프롤로그
아무도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세상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왕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시대를 불렀고,
정복자들은 칼끝으로 국경을 그었으며,
학자들은 인간의 지혜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별을 바라보며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별들이 떠 있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자신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건 뒤에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무도 몰랐다.
역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약속이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울리고 있다는 것을.
그곳에는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없었다'라는 과거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과거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간도 없었다.
동쪽도 서쪽도 없었고,
높음도 낮음도 없었다.
빛과 어둠을 구별할 자리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존재하시는 분이 계셨다.
그분은 시작되지 않으셨고,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지도 않으셨으며,
누군가에 의해 이름을 얻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스스로 계셨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분은 영광이 필요해서 영광을 만드신 것이 아니었다.
사랑받을 누군가가 필요해서 사랑의 대상을 만드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완전하셨다.
영원하셨다.
충만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뜻 안에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모든 역사가 있었다.
그때,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소리가 아니었다.
말씀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질서였다.
그 말씀 앞에서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태어났다.
공간이 펼쳐졌다.
빛이 나타났다.
수많은 별들이 자기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천상의 존재들이 창조주 앞에 엎드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창조물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드러내시는 영광이었다.
찬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찬양보다 더 오래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의 작정.
그리고 그 작정 안에는
아직 이름조차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예정된 사람들.
넘어질 것이지만 다시 일어날 사람들.
죄를 지을 것이지만 회개할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실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영광에 이를 사람들.
그러나 창조된 세계에는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비밀 하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에는
두 개의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선한 길과 악한 길이
동등한 힘으로 서로 싸우는 세계가 아니었다.
악은 창조될 수 없었다.
악은 하나님과 맞먹는 힘도 아니었다.
악은 선을 비틀 수 있을 뿐이었다.
진리를 거짓으로 뒤집고,
사랑을 욕망으로 바꾸고,
자유를 반역으로 바꾸고,
예배를 우상숭배로 바꾸는 것.
그것이 악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한 존재가 그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아름다웠다.
지혜로웠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조주를 바라보던 눈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창조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생각.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탐내는 순간.
반역.
그것은 검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그 뒤로 수많은 시대가 흘렀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었다.
왕국은 세워지고 무너졌다.
도시는 번성하고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도 했고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는 일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가는 밤중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다.
누군가는 길 위에서 쓰러졌다.
누군가는 감옥에서 찬송했다.
누군가는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하루에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한 문장을 듣게 되었다.
"나를 따라오라."
그날도 세상은 평범했다.
사람들은 장을 보았고,
아이들은 뛰어다녔으며,
상인들은 값을 흥정했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졌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미워했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었다.
아무도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천둥도 치지 않았다.
불기둥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다가 갈라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역사의 방향이 바뀌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엘리안이었다.
스물여섯 살.
왕도 아니었다.
전사도 아니었다.
선지자라고 불린 적도 없었다.
그는 베리트 왕국의 북쪽 끝에 있는 작은 도시
아벨론에서 기록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하루는 늘 같았다.
해가 뜨면 기록관으로 갔다.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고,
왕의 명령을 베껴 쓰고,
세금 장부를 확인하고,
사람들이 가져오는 문서를 보관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안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한 장의 문서를 펼쳤다.
문서에는 왕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그는 첫 줄을 읽었다.
그리고 멈췄다.
이상했다.
문서의 글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엘리안은 눈을 비볐다.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피곤한 모양이군."
그가 혼잣말했다.
그런데,
문서의 맨 아래에
자신이 쓰지 않은 문장이 하나 나타나 있었다.
엘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문장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잉크가 번진 흔적도 없었다.
누군가의 필체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적혀 있었는데
이제야 자신에게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 문장은 단 네 글자였다.
"너를 부른다."
엘리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 밖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문서를 보았다.
문장이 사라졌다.
"뭐지?"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음성은
자신의 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엘리안."
그는 얼어붙었다.
다시 들렸다.
"엘리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물었다.
기록관 안의 사람 몇 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엘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사람들의 몸 뒤에
가느다란 빛이 있었다.
아주 희미해서 처음에는 햇빛의 반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빛이 아니었다.
실이었다.
수많은 사람에게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실.
어떤 실은 밝았다.
어떤 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떤 실은 검게 뒤틀려 있었다.
엘리안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왜..."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엘리안은 천천히 돌아섰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바닥에
작은 빛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었다.
빛은 손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것은 한 줄기의 실이 되어
기록관의 바닥을 지나
문 밖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안은 그 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을 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대답은 즉시 오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엘리안은 이상하게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때,
음성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분명했다.
"나를 따라오라."
엘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두려움과 함께 이상한 저항이 솟아올랐다.
"왜 제가요?"
대답이 없었다.
"저보다 좋은 사람이 많잖아요."
침묵.
"저는 믿음도 없습니다."
그때,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 문장이 그의 마음에 떠올랐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엘리안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성.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그 순간,
기록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말발굽 소리도,
바람 소리도,
시계의 진동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엘리안은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서
아주 작은 빛 하나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크지 않았다.
검은 어둠을 단번에 몰아낼 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것은 촛불처럼 떨리고 있었다.
엘리안은 그 빛을 바라보며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
아무도 듣지 못하는 하늘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한 기록자가 오래된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는 엘리안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한 문장을 기록했다.
"오늘, 한 사람이 부르심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세 번째 문장이 이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다."
기록자는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하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아벨론의 하늘에
아무도 볼 수 없는 별 하나가 켜졌다.
그 별은 엘리안의 별이 아니었다.
그의 운명을 나타내는 별도 아니었다.
그 별은 오직 하나를 증언하고 있었다.
부르시는 분의 신실하심.
그리고 멀리,
아무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이 천천히 떠졌다.
"또 시작됐군."
그 존재는 웃었다.
"이번에는..."
긴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얼마나 오래 버틸까?"
그 순간,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둠은 몰랐다.
그가 상대해야 할 것은
엘리안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를 부르신 분의 신실하심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어둠이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