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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대한민국② 학교 가는 길은 작은 세상이었다.

대한민국생활문화사 · 곽영민 · 입력 · 수정

그때 그 시절 대한민국 ②

 

학교 가는 길은 작은 세상이었다.

 

1978년 봄, 인천.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책가방을 메면 집 앞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그때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가 하루의 시작이었다.

문을 나서면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없었고,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도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친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야! 빨리 와!"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 명이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어느새 작은 행렬이 만들어졌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20~30분은 단순한 등굣길이 아니었다. 친구를 만나고, 계절을 느끼고, 세상을 배우는 또 하나의 교실이었다.

나는 인천 만수3동에서 간석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 이해를 돕기위한 이미지(코리아인사이트) 

지금 생각하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걸음으로는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집을 나설 때마다 어머니는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차 조심해!"

당시 학교에 가려면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걸어야 했다.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인천에는 공장과 물류 차량이 크게 늘었고, 대형 트럭과 버스가 쉼 없이 도로를 오갔다. 지금처럼 보행 환경이 잘 갖춰진 곳은 많지 않았기에 어린아이들의 등굣길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을까.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이 달리던 차량에 부딪혀 의식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 큰 화는 면했지만, 그날의 놀라움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차 조심해."라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자식을 향한 기도였다.

그렇게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교로 향했다.

학교 가는 길에는 문방구가 있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연필과 공책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아폴로, 쫀드기, 별사탕, 풍선껌….

주머니 속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진열장 앞을 서성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 담장이 보이면 발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교문 앞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맞이했고, 운동장에는 벌써 공을 차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같은 운동화를 신은 것도 아니었고, 같은 가방을 멘 것도 아니었다.

생활 형편은 제각각이었지만, 친구를 차별하는 분위기는 거의 없었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1978년의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경제는 산업화를 향해 힘차게 달렸고, 도시에는 새로운 공장과 주택이 들어섰다. 인천 역시 항만과 공업도시로 성장하며 인구가 꾸준히 늘어났다. 한편 국민학교 교실은 한 반에 50명 이상이 함께 공부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아이들은 대부분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한국교회도 성장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974년 열린 "엑스플로 74" 와 1977년에 열린 "77 복음화대성회" 이후 복음 전도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교회마다 새벽기도와 부흥회가 활발히 이어졌다. 많은 가정에서 주일이면 온 가족이 교회로 향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 이해를 돕기위한 이미지(코리아인사이트)

세월은 흘렀다.

이제 아이들은 부모님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경우가 많다.

학교 앞에는 차량이 줄지어 서고, 친구를 만나도 휴대전화를 먼저 꺼낸다.

세상은 훨씬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 시절 학교 가는 길에는 자동차보다 친구가 있었고, 이어폰보다 웃음소리가 있었으며, 휴대전화보다 끝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계절을 배우고, 우정을 배우고, 세상을 배웠다.

문득 골목 끝에서 친구가 손을 흔들며 외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야! 늦겠다. 뛰어!"

그 한마디가 우리들의 아침을 가장 신나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 시대의 기록

1978년은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인천은 항만과 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주거지역이 확대되었고, 많은 어린이들이 걸어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학급당 학생 수는 오늘날보다 훨씬 많았으며, 등굣길의 골목과 문방구, 시장은 아이들의 생활공간이자 배움의 현장이었다. 한국교회 역시 1970년대 복음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며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공동체 역할을 담당했다.

1977년 당시 부흥사 이태희 목사(현, 성복교회 원로목사, (사)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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